|
고독과 함께하는 사랑 |
고독을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도 사랑한다
혼자 있는 시간을 가져야만 나 자신을 재충전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이것저것 묻고 요구하면, 나는 완전히 지쳐버립니다. 나는 텅비어 버려요. 가끔은 짜증이 나기도 하구요.
그럴 때면 딱 한 가지밖에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깨닫기 위해서, 나의 리듬을 되찾기 위해서,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 나를 채울 수 있기 위해서 혼자만의 시간을 충분히 갖고 싶을 뿐이지요.
- 우리의 내면세계는 무슨 수를 써서든 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그 내면을 되찾을 때 우리는 행복해진다. 우리의 내면세계는 편안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거북이처럼 우리에게만 속해 있는 공간을 정해놓고는 한다.
우리가 우선권을 부여하고, 보호하고 싶은 공간을 말한다. 그 결과, 타인도 자기만의 공간을 갖는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하고, 서로 그 경계를 존중할 줄 안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개념
- 우리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어떤 개념도 갖고 있지 않다면, 타자와의 경계 역시 확정될 수 없다. 또한 타자의 경계를 존중해야 할 이유도, 나의 경계를 내세울 이유도 없을 것이다. 우리의 영역은 어디에 위치하는가? 또 타자의 영역은 어디에 위치하는가?
어떤 이들에게 타자는 자기 자신의 연장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타자를 자기 자신을 취급하는 습관 그대로 대하고, 타자에게 동일한 요구를 가한다. 그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 불만스러워 한다면, 타자에 대해서도 불만스러워할 것이다.
또한 스스로에게서 싫어하는 점을 타자에게서 발견하고 공격하든가, 자기들이 소유하고 싶어하는 점을 발견하고, 자신과 동일시하기를 원할 것이다. 특히 연인사이에는 배타적인 소유관계의 성격이 나타나기 때문에, 상대의 몸과 영혼이 자기에게 속해 있다는 관점마저도
애정의 힘으로 정당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때문에 연인들은 상대에게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기를 망설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상대와 나 사이에는 아무런 차별화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연인들은 서로에 대한 소속보다는 아예 두 사람이 하나가 되기를 소망한다.
연인은 하나가 되기를 원한다
- 그 때문에 그들은 상대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싶어하는 동시에 자신의 비밀의 화원에 대해서도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어한다. 이 융합의 욕구 내에서 타자는 단순히 모든 것을 공유할 뿐 아니라 나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때로는 정반대로, 자신이 타자의 문제들을 떠맡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들은 타자를 돌봐주기를 좋아하고, 타자가 자신들을 돌봐주는 것도 좋아한다. 그래서 타자를 돕고, 보호하며, 자기 자신이 대우받고 싶은 방식대로 대우한다.
타자를 통해 자신을 탐색하는 사람은 점점 더 자신을 잃어버리기 쉽고, 결국은 그 상대마저 잃어버릴 위허이 잇다. 타자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데 필요한 여지를 남기지 않아야 안심이 된다면, 우리가 그토록 갈구하는 사랑과 애정의 몸짓들도,
결국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만큼 마음을 안정시켜주지 못할 것이다.
그 사람이 사랑한다고 말해 주기를, 나에게 다정하게 대해주기를 너무나 바라다 보니, 나중에는 그런 말을 듣고 행동을 보아도 마음이 안 놓이더군요. 내가 그런 말을 해주기를 바라니까 그냥 형식적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들더라구요.
- 상대에 대한 요구가 지나치면 지나칠수록 그 사람의 자발적이고 자연스러운 의도는 억제되는 법이고, 그럴수록 요구하는 사람은 자신의 불안을 부풀릴 핑계를 찾아내기 쉽다. 집합 이론에서 교집합이 그렇듯이, 나와 타자의 공통적인 영역은 완전히 내 것도 아니요,
완전히 상대의 것도 아닌 제3의 영역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함께하는 순간들을 가질 수 있고, 서로 사랑할 수 있으며, 우정과 애정과 공모의식을 함께 나눌 수 있다. 함께 가족을 이룰 수도 있고, 집단을 이루어 일하거나 같은 팀에 소속되어 운동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존재를 이 공통영역으로 축소시켜 생각하는 우는 범하지 않도록 신경 써야 한다. 어떤 애정관계나 일에 완전히 빠져서 자기 자신을 망각한다면, 우리 삶을 오직 한 가지 대의를 위해 온전히 바친다면,
'모든' 역량을 단 한 가지 목표에 집중한다면, 스스로 위험을 자초하는 격이다.
이럴 때 '고독'은 참을 수 없는 것이 된다
- 우리를 정의하는 것을 우리에 대한 외부의 작용들 밖에서는 찾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내면세게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에 그 세계와 홀로 대면하기를 두려워한다. 우리는 그 세계를 좋아하지도 않거니와, 온 힘을 달해 도망치면서
결국 그 세계를 없애고자 한다. "자유시간이 생기면 할 일을 잔뜩 만들어놓지요. 조용히 나 자신을 대면하기 싫어서 무슨 일이든 만들고 말아요" 밤의 침묵과 고요 속에서보다는 대낮의 햇살과 흥분 속에서 지내기가 더 편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어떤 이는 밤의 세계를 되찾는 데 엄청난 어려움을 겪게 되기도 한다. 자기 자신을 마주보지 않을 수 없는 이 수간이 평정심보다는 불안감을 낳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거추장스러운 외부적인 일들에서 마침내 벗어나 자신을 돌아보거나 꿈을 꾸기에 좋은 어둠과 평온을 되찾았다는 느낌보다는, 유령들에 대한 공포로 밤을 채우며 무서워하게 된다.
혼자 있을 때 나 자신과 함께 있고 싶지 않아요
언제나 자신을 안심시켜줄 사람의 체온을 찾는 사람들은 '고독'이라는 개념으로부터는 '버림받았다'라는 싸늘한 느낌밖에 받지 못한다. 그들은 외부에서만 안도감을 찾을 수 있고, 그 안도감조차도 끊임없이 갱신되어야 한다.
그들이 자기 자신을 발견하면서 유년기를 재발견하는 이상, 유년기는 정동적 부하의 근원에 있지 않을 것이며, 충분한 애정표현을 받지 못했기에 마음을 계속 따뜻하게 덥힐 수 없는 듯하다.
"우리는 고독하다"
- 고독의 사회적 이미지, 즉 혼자 있기를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으나 타자가 결여된 상태라는 부정적 이미지에서 자유로워진다면, 우리의 고독은 풍요롭고 충만할 수 있다. 스스로 고독을 추구하며, 고독이 실제로 주어졌을 때 그것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법도 배우게될 것이다.
우리가 만약 타자가 우리의 어려움과 기쁨을 온전하게 공유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듯이 고독을 고통이나 욕망이 따를지언정, 피할 수 없는 개념으로 받아들인다면, 나 자신이 완벽하게 하나로 표상되듯이 자신에게 정말로 무엇이 좋은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라고 인정한다면, 우리는 이 고독을 좀 더 쉽게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 고독을 좀 더 잘 경험할수록 그것을 피하기 위해 엄청난 대가를 치르는 짓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고독을 감당하기 힘들다는건,
- 결국 자기 영혼을 이러저러한 타협의 여지에 넘긴다는 뜻이다. 때로는 자신을 타락시키는 관계에 빠지거나, 관계를 가장한 증오, 삶보다는 죽음에 더 가까운 교감을 얻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가 그토록 기대하는 그 타자는 이 경우에 우리의 친구도 공모자도 될 수 없다.
그는 따뜻한 온기도 우리가 열망하는 애정도 가져다 주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지금 존재하는 착각을 제공하는 봉쇄 혹은 한계일 뿐이다. 그리고 고통은 우리가 살아가고 싶은 방식과 실제 우리의 삶의 괴리가 크면 클수록 더욱 가혹해지며,
우리가 생각하는 애정관계와 끊임없는 실망으로 나타나는 현실의 간격이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더욱 처절해진다.
고독을 감당할 수 있게 된다면,
- 연인을 선택할 때나 그 사람과 함께 살기로 결정할 때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 아무나, 아무 때나 상대를 받아들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공허가 우리 앞에 도사리고 있지 않은 까닭이다. 그러한 내적 공허는 모든 것을 구분하지도 않고 삼켜버리고,
대산이 주멍싱든 간에 그것을 잃어버릴까 두려워서 무조건 취하는 병적 허기증과 같은 욕구를 동반한다. 그런 사람은 온갖 음식, 알코올, 약물을 닥치는 대로 소비하고, 온갖 활동, 장소, 사람 등을 비롯해서 일시적으로나마 '충만하다'는 착각을 품을 있게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섭렵하지만 결코 만족을 얻지 못한다. 그 욕구는 거의 절대적이어서 한계가 없으며, 절대 포만감을 누리지 못한다. 이 경우에는 어떤 타자도, 아무리 커다란 쾌락도 만족감을 줄 수 없다.
※ 진정한 충만감이란, 외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들에 앞서 존재하는 것이다. 비록 그 감정은 의존적일지라도, 우리가 실망을 맛보거나 타자가 결여되어 있는 경우에 우리의 정체성까지 사라지게 할 정도로 의존적이지는 않다.
댓글 없음: